제9회 아시아실험동물학회 정기학술대회에서 주영신 가톨릭대 의생명산업연구원 실험동물전문수의사가 발표하고 있다./아시아실험동물학회
제9회 아시아실험동물학회 정기학술대회에서 주영신 가톨릭대 의생명산업연구원 실험동물전문수의사가 발표하고 있다./아시아실험동물학회

“실험동물 수의사는 아직 많이 알려진 직업은 아닙니다. 연구 현장에서 과학 발전에 기여하는 실험동물의 복지와 건강을 위해서 일합니다.”

신약 개발과 생명과학 발전의 위대한 성과 뒤에는 생쥐를 비롯해 제브라피시, 개, 돼지, 원숭이 등 수많은 다양한 동물들의 희생이 있다. 이렇게 인류 과학 발전에 이바지한 공로에도 불구하고 각종 실험에 사용되는 거의 모든 동물들의 운명은 정해져 있다. ‘실험 후 안락사’라는 숙명을 피해가기 어렵다.

최근 세계 과학계는 100년 가까이 이어져온 동물 실험에 대한 생각을 바꾸고 있다. 인간과 똑같은 생명체를 존중하고 무분별한 실험을 자제해야 한다는 반성이 제기되면서 점차 실험동물 사용을 줄이거나 중단하는 방향으로 생각을 바꾸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여러 대체 기술이 개발됐는데도 여전히 동물실험이 불가피한 연구들이 남아있는 과도기인 것도 사실이다. 실험동물 수의사는 이런 과도기를 현명하게 극복하기 위해 과학자들과 수의학자들이 고안한 새로운 직업이다.

주영신 가톨릭대 의생명산업연구원 수의사와 김지영 이화여대 의대 실험동물실 수의사도 아직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실험동물 수의사를 하고 있다. 두 수의사는 13일부터 15일까지 제주 국제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제9회 아시아실험동물학회 정기학술대회에 연사로 참석했다.

주 수의사는 “실험동물 수의사의 중요한 역할을 가이드라인에 따라 실험동물을 관리하고 연구자들을 교육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동물보호법이 개정되면서 올해 3월부터는 1년에 사용하는 동물 수량이 1만 마리 이상인 실험동물 시설은 전임 수의사를 고용해야 한다. 실험동물 수의사는 주로 기관에 소속되어 연구에 사용되는 모든 종의 동물을 치료하고 다루는 직업이다. 국내에는 지난달 기준 420명이 활동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동물실험에 ‘3R 원칙’이 강조되면서 실험동물 수의사의 역할도 중요해지고 있다. 3R은 대체(Replacement), 감소(Reduction), 개선(Refinement)을 뜻하는 말이다. 가급적 실험 과정에서 동물 실험을 대체하고 사용하는 동물의 수를 최소화하며, 동물이 경험할 고통과 피해를 줄여야 한다는 내용이다. 이 추세에 맞춰 미국과 유럽 등에서는 동물 실험을 단계적으로 폐지하겠다는 계획을 내놓고 있다.

제9회 아시아실험동물학회 정기학술대회에서 김지영 이화여대 의대 실험동물실 수의사가 발표하고 있다./아시아실험동물학회
제9회 아시아실험동물학회 정기학술대회에서 김지영 이화여대 의대 실험동물실 수의사가 발표하고 있다./아시아실험동물학회

김 수의사는 “아직 국내에서는 동물실험 폐지에 대한 영향을 직접적으로 느끼지는 않고 있다”고 말했다. 국내에선 전체적으로 실험동물 수가 늘었다 줄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아직은 증가하는 추세라는 것이다. 김 수의사는 “작은 쥐인 ‘마우스’를 대상으로 한 실험이 꾸준히 많아지고 있다”면서도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동물 실험을 줄일 수 있으면 줄이자는 의견은 공감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연구자들과 실험동물 수의사 간의 의견차는 여전히 존재한다. 연구자들은 실험을 한 뒤 결과를 오래 지켜보고 싶은 반면, 수의사들은 한시라도 동물들의 고통을 줄여줘야 한다는 입장이다.

주 수의사는 “실험을 종료한 뒤 동물들을 안락사시키는 것도 힘들지만, 연구자들이 실험동물의 복지보다는 결과를 내려는 데 우선하는 경우가 있어 이견 조율이 어렵다”며 “학위논문이 걸려있어 실험 기간을 늘리고 싶을 수도 있지만 지금 당장 실험동물을 왜 안락사해야 하는지 이해시킬 방법을 많이 고민한다”고 밝혔다.

국내에서는 연간 500만 마리의 동물이 과학적 목적으로 이용된다. 전 세계적으로 1억 마리 이상의 동물이 연구나 시험에 사용되는 것을 고려하면 작지 않은 비중이다. 이런 상황에서 국내에서도 동물실험 폐지가 가능할까. 주 수의사는 ‘동물실험 폐지하겠다’ 선언은 할 수 있지만 현실적인 대책이 필요하다고 꼬집었다.

주 수의사는 “동물실험을 대체하고 줄이는 쪽으로 초점을 맞출 수도 있지만 일단 현재 하는 실험들이 잘 돼야지 실험 수를 줄일 수 있다”며 “3R 원칙이 현장에서 잘 지켜지고 한 번의 실험으로 결과를 얻을 수 있도록 실험동물 수의사들이 연구자들을 교육하고 동물들을 관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국을 비롯해 일본, 중국, 뉴질랜드, 대만 등 아시아·태평양 12개국 실험동물수의사들은 이번 대회에서 아시아·태평양 실험동물수의사회(APCLAM)를 결성했다. 초대 회장은 한국실험동물수의사회장이자 한국실험동물학회장인 성제경 서울대 수의대 학장이 맡았다.

두 사람은 국내 실험동물 분야는 아시아에서 손꼽히는 정도라며 동물실험 개선에 대한 기대감을 높였다. 주 수의사는 “한국은 아시아 최초로 동물 실험 시설에 전임 수의사를 둬야 한다는 법이 생겼고 연구 수준도 높다”며 “이전에는 수의사 의무 고용제도가 없어 전문가 없이 학생이나 연구자들이 실험했지만 요즘 연구자들은 윤리에 어긋나는 사례를 보면 말 그대로 참지 않는다”고 했다.

김 수의사는 “원로 실험동물 수의사들의 꾸준한 노력으로 실험동물의 처우나 동물실험 환경이 더 개선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